시간 속의 공간, 공간 속의 시간

저자 갤러리 스페이스타임, 이귀영

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은 백색 공간 안에 있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해보자. 그곳에서 우리는 무엇을 보고,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생각할 수 있을까? 공간과의 교감이 없다면, 우리의 존재를 정의할 수 있는가? 인간이 세상을 이해하는 과정에는 우리의 눈을 통해 보는 시각, 손으로 느끼는 촉각, 발로 걸어다니며 땅을 인지하는 등의 공간과의 상호작용 없이는, 그리고 그 공간 속에 함께 존재하는 사물의 인식 없이는 우리는 스스로의 존재를 정의할 수 없다. 이귀영 작가의 ‘출구-무한공간’ 시리즈는 이러한 공간과 시간의 상호의존적 관계를 역사적 맥락과 자연으로의 회귀적 관점을 통해 재해석한다.

공간 속의 시간

출구-무한공간-해체 by 이귀영 (2001) - Mixed media on canvas

우리가 살고 있는 공간은 시간의 흐름이 기록된 캔버스와 같다. 이귀영 작가가 보는 공간은 단순히 정적인 기록의 공간이 아니다. 공간은 해체되고, 재구성되며, 시간과 기억 속에서 새롭게 변형된다. 오래된 건축물은 수백 년 혹은 수천 년 동안 존재하면서 그 시대의 기억을 품어왔지만, 그 형태가 바뀌고 용도가 변화하며 새로운 의미가 덧입혀진다. 한 역사 속, 같은 공간 위에 서로 다른 시간적 기록이 중첩되면서 공간은 시간의 증인이 된다.

‘출구-무한공간-해체’는 지금의 흥례문 자리에 있던 전 국립중앙박물관의 해체되는 형상을 담고 있다. 이 건물은 본래 일제강점기 시대에 조선총독부 청사로 건립된 것으로, 조선왕조의 상징인 경복궁의 정문 앞에 의도적으로 배치되어 한국의 문화적 정체성을 약화시키고자 했던 역사적 상처를 담고 있다. 해방 후에는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사용되었으나, 1995년 한국 정부의 문화 주권 회복 노력의 일환으로 철거되었다.

작가는 이 역사적 맥락을 작품에 담아내면서, 현대 건축의 특징적인 확장되고 열린 공간, 투명한 유리공간으로 현대 공간을 표현하고 그 위에 흥례문의 실루엣을 중첩시켰다. 특히 주목할 점은 캔버스 가운데를 물리적으로 뚫어 TV 모니터를 설치한 것인데, 이 모니터 속에는 현재 경복궁을 한가로이 오가는 사람들의 영상이 담겨있다. 이를 통해 작가는 근대와 현대라는 시간적 공간의 연장선상에서 만들어지는 역사의 교차점을 사유의 장으로 제시하며, 같은 공간에 축적된 서로 다른 시간의 다층적 의미를 시각적으로 구현해낸다.

시간 속의 공간

출구-무한공간-자연 by 이귀영 (2001) - Mixed media on transformed canvas & Single channel video

공간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끊임없이 변화하고 재해석된다. 우리는 과거를 기억 속에 품지만, 그 기억은 다시금 우리가 머물렀던 공간의 일부로 남는다. 인간의 시간은 유한하기에, 인생의 마지막을 맞이할 때 우리는 자연으로 회귀하게된다. 인간이 만들어낸, 인간의 시간을 담은 건축물들 또한 우리 기억의 흔적을 반영한다.

‘출구-무한공간-자연’은 건축물과 자연적 공간을 한 화면 안에 어우러지게 표현한 작업이다. 이 작품에서 실시간 흐르는 동영상 속의 폭포는 반만년을 흘러온 우리 역사 속에 흐르고 있는 정신을 상징하며, 이는 개념적 ‘출구’라는 의미를 지닌다. 작가는 도시가 생기기 이전의 모습인 자연(폭포, 강, 하늘, 대지 등)의 공간이 건물과 한 화면에 투영되듯 겹쳐 그려냄으로써, 과거에서 현대, 미래를 자연과 다른 공간과의 만남으로 표현한다. 이를 통해 시간속의 공간과 공간속의 시간이 유기적으로 움직이는 것처럼 생명력 있고 회화적이게 표현하고자 한 작품이다.

캔버스의 변형과 영상 매체의 결합은 정적인 회화의 한계를 넘어, 시간의 흐름을 직접적으로 작품 안에 끌어들인다. 흘러가는 폭포의 영상은 멈춰있는 듯한 건축물과 대비되며, 상대적으로 영원한 자연의 시간과 유한한 인간 문명의 시간이 공존하는 장면을 연출한다.

시공간의 재해석

‘출구-무한공간’ 시리즈는 표면적으로 보이는 미술 작품으로써의 가치를 넘어, 인간이 살고 있는 시간과 공간에 대한 깊은 철학적 탐구를 담고 있다. 작가는 특정 역사적 맥락과 당시의 공간을 캔버스에 담아, 우리가 당연시 여기는 시간과 공간의 개념에 질문을 던진다. 이귀영 작가의 예술은 역사적 상처와 그 치유의 과정을 시각화하여 집단적 기억과 정체성을 형성하는 중요한 매개체로 표현될 수 있다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